허영인 회장의 '말뿐인 사과'
중대재해처벌법 우회하는 '바지사장' 시스템
"SPC, 죽음의 빵 어떻게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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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세를 회피하려 계열사 주식을 저가에 팔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2024년 2월 2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근로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면서 SPC 그룹의 세 번째 연쇄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2022년 허영인 회장의 대국민 사과와 1000억원 안전 투자 약속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비극 앞에서, SPC의 안전경영은 공허한 구호에 그쳤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 또다시 반복된 '끼임 사고' 참극
지난 19일 오전 3시경 경기 시흥시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여성 근로자 A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상반신이 끼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A씨는 뜨거운 빵을 식히는 공정에 사용되는 컨베이어 벨트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윤활유를 뿌리는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사고 현장은 공장 '풀가동' 상황이었고, 컨베이어 벨트 소음을 줄이기 위해 작업자가 몸을 기계 안쪽 깊숙이 넣어 윤활유를 발라야 하는 위험한 작업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료 근로자는 "컨베이어 벨트가 삐걱대 몸을 깊숙이 넣어 윤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사고가 발생한 컨베이어 벨트가 30년 이상 된 노후 설비였다.
2인 1조 근무 원칙도 지켜지지 않은 채 새벽 시간대에 홀로 위험한 작업을 하던 중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SPC 그룹 계열사에서 발생한 세 번째 사망사고다.
2022년 10월 평택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근로자가 소스 교반기에 끼어 숨졌고, 2023년 8월에는 성남 샤니 제빵공장에서 50대 여성 근로자가 반죽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모두 동일한 '끼임 사고' 유형으로, 구조적인 안전관리 부실을 보여준다.
사고 직후 경찰은 시화공장 센터장 등 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으며, 고용노동부는 주요 8개 라인에 작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SPC삼립은 전체 매출의 12.5%에 해당하는 연 4300억원 규모의 시화공장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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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SPC본사. (사진=연합뉴스) |
◇ 허영인 회장의 '말뿐인 사과'
2022년 10월 21일 서울 양재동 SPC 본사에서 열린 허영인 회장의 대국민 사과는 시작부터 논란이었다.
평택 SPL 제빵공장 사고생 엿새 만에 나온 '뒷북 사과'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질의응답조차 거부한 채 일방적 입장 전달에 그쳤기 때문이다.
당시 허 회장은 "향후 3년간 총 1000억원을 투자해 그룹 전반의 안전경영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안전시설 확충 및 설비 자동화에 700억원, 작업환경 개선 및 안전문화 형성에 200억원, 사고 발생 SPL 법인에 1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내놨다.
하지만 3년이 지난 현재, 약속한 투자금 중 835억원이 집행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변화는 미미했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시화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30년 이상 된 노후 설비였으며, 2인 1조 근무 원칙 미준수 문제도 여전히 지적되고 있다.
특히 SPC가 835억원 중 고강도·위험작업 자동화에 228억원, 안전설비 확충에 225억원을 투입했다고 밝혔지만, 교육훈련비는 고작 4000만원에 그쳤다.
설비 투자에만 치중하고 근본적인 안전의식 개선은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번 사고가 발생한 SPC삼립 시화생산센터 안전보건팀이 지난해 12월 안전경영포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안전경영위원회의 15차례 정기회의와 현장실사가 무색할 정도로 현장의 안전관리는 여전히 부실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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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2022년 10월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 본사에서 평택 SPC 계열사 SPL의 제빵공장 사망 사고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 노조탄압, 안전 문제와 직결
2024년 4월 검찰에 구속 기소된 허 회장은 2019년 7월부터 2022년 8월까지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 조합원 570여명을 상대로 노조 탈퇴를 종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황재복 SPC 대표이사는 검찰 조사에서 "허 회장이 '회사에 우호적인 한국노총 조합원을 모으고 민주노총은 탈퇴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승진 평가에서 민주노총 소속이라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주거나, 사측에 친화적인 한국노총 소속 노조 조합원 모집을 지원하는 등 체계적인 노조 와해 작업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러한 노조탄압이 안전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현장의 안전 문제를 제기하거나 위험한 작업 환경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차단되면서, 경영진은 현장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허 회장은 현재 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검찰은 그를 "그룹 전체를 총괄하며 노조에 대한 대응방안을 최종 결정·지시하는 한편, 노조탈퇴 현황과 국회·언론 대응 상황을 수시로 보고받는 등 본건 범행을 주도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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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
◇ 중대재해처벌법 우회하는 '바지사장' 시스템
2022년 1월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에도 불구하고 SPC 그룹의 연쇄 사망사고가 막지 못한 이유는 법의 구조적 한계에 있다.
지금까지 처벌받은 것은 강동석 전 SPL 대표(징역 1년·집행유예 2년) 등 계열사 대표 선에서 마무리됐을 뿐, 허영인 회장과 같은 그룹 총수는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에게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부과하지만, 대기업의 경우 그룹 총수와 계열사 대표 간의 책임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이 악용되고 있다.
허 회장은 과거 "실질적 경영책임자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면했다.
2024년 말까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1심 판결을 받은 31건 중 29건이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나 중간 관리자 수준에 그쳤다. 대기업 총수가 직접 처벌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번 시화공장 사고에서도 경찰은 공장 센터장 등 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지만, 허 회장에 대한 직접적인 수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가 허 회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지만, 과거 사례를 볼 때 총수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법조계에서는 "기업들이 소위 '바지사장'으로 불리는 안전책임자를 따로 둬 대표이사는 처벌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며 "대표이사들이 면책을 하려는 목적으로 법이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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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
◇ "SPC, 죽음의 빵 어떻게 멈출 것인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SPC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반복된 산재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명백히 규명해야 한다"며 정부의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그는 "2022년 사고 당시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또다시 유사한 사고가 반복 발생한 데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한나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은 "도대체 노동자가 몇 명이나 더 숨져야 죽음의 빵은 멈추나"라며 "SPC는 이제 죽음의 빵을 어떻게 멈출 것인지 답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시화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그룹 총수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며, 화학섬유식품노조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고 구속·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시화공장은 최근 야구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크보빵'의 주요 생산기지였다.
지난 3월 출시 후 41일 만에 1000만 개가 판매되며 SPC삼립 역대 최고 히트 상품이었던 크보빵이 이제는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고 발생 다음 날부터 SNS에서는 '크보빵에 반대하는 크보팬' 계정을 통해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한 팬은 "기업의 이익이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시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고, 다른 팬 역시 "반복되는 사고는 더 이상 사고가 아니다"라고 분노했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던킨, 파스쿠찌 등 SPC 브랜드 불매 리스트가 공유되며 "피 묻은 빵"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허 회장의 '말뿐인 사과'가 아닌 실질적인 구조 개혁을 통해서만 반복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알파경제 이준현 기자(wtcloud83@alpha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