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성' 명분 뒤 숨은 선별적 혜택…투명성 원칙과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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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빗썸 전광판에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시세가 게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국내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이 공식적으로는 중단했다고 발표한 보상 프로그램을 일부 VIP 회원에게만 비밀리에 지속 운영해온 정황이 드러나면서 시장 공정성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해당 프로그램으로 특정 가상자산의 거래량이 인위적으로 급증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위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 메이커 리워드 종료 후에도 소수 VIP 대상 비밀 보상
빗썸은 지난 5월 시장 유동성 공급자에게 거래 수수료 일부를 환급하던 '특별 메이커 리워드' 프로그램의 종료를 공식 중단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호가창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메이커 주문 체결시 거래금액의 일정 비율을 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업계에 따르면 빗썸은 프로그램 공식 종료 이후에도 거래량이 많은 소수 VIP 회원들에게 개별 문자를 발송해 특정 가상자산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요청하고 이에 대한 현금성 보상을 지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투자자는 빗썸으로부터 5개 종목에 대해 메이커 활동을 해주면 종목별로 하루 50만원씩, 총 25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이러한 보상 대상 종목들이 대부분 시가총액이나 거래량이 극히 작은 '마이너 코인'들이라는 점이다.
해당 이벤트 기간 중 대상 가상자산 중 하나였던 시아코인의 경우 이벤트 시작 전인 6월 19일 하루 거래량이 2500만원에 그쳤지만, 이벤트 기간 중에는 1000억원을 넘나들며 수십 배 급증했다.
이벤트 종료 직후인 7월 2일에는 다시 300만원 수준으로 급락했다.
이는 빗썸이 모든 투자자에게 동일한 거래 환경을 제공하겠다던 기존 약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다.
대다수 일반 투자자들은 보상 프로그램이 사라진 줄 알고 정상적인 수수료를 모두 지불하며 거래에 참여하는 동안, 선택받은 소수만이 거래 비용을 보전받거나 추가 수익까지 보장받는 불공정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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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
◇ 시장조성인가 시세조종인가…모호한 경계선
빗썸 측은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시장 가격이나 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닌 일반적인 마케팅 활동"이라고 해명했다.
유동성이 부족한 특정 코인의 호가창을 채워 외부 세력의 시세 조종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가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제10조가 금지하는 시세조종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상자산법 제10조는 '가상자산 매매를 유인할 목적으로 그 매매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 듯이 잘못 알게 하거나, 시세를 변동시키는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
특히 현행법상 가상자산 시장에는 주식 시장과 달리 거래소의 시장조성 행위를 시세조종의 예외로 인정하는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다.
주식시장의 시장조성자는 거래소와 공식 계약을 체결한 증권사가 투명한 절차에 따라 지정되며, 매수·매도 양방향 호가를 지속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엄격한 의무를 진다.
반면 빗썸의 VIP 프로그램은 투명성도 양방향 호가 의무도 없이 거래소가 필요에 따라 특정인에게 일방적으로 거래를 유도하는 구조다.
이는 합법적 시장조성이라기보다 인위적인 거래량 부풀리기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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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빗썸) |
◇ 규제 사각지대서 제도권 진입 눈앞인데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 이후 금융당국은 불공정거래 척결 의지를 분명히 해왔다.
실제로 법 시행 후 첫 번째 사례로 자동매매 프로그램을 이용해 허수 주문을 반복 제출한 혐의자를 단 2개월 만에 검찰에 통보하는 등 신속한 대응을 보여줬다.
문제는 빗썸의 VIP 프로그램이 이러한 규제 강화 흐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빗썸은 '호가창이 얇은' 특정 코인의 유동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시세 급등락을 방지하기 위해 VIP들에게 '호가창을 채워주는 역할', 즉 시장조성자 역할을 맡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제도권 금융의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다. 전통 금융시장에서 시장조성자가 되려면 금융당국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자격을 인정받고, 지속적인 감독을 받으며, 중립적 입장에서 양방향 호가를 제출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장조성자는 자신의 이익추구가 아닌 시장 전체의 유동성 공급이라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주체다.
반면 빗썸이 시장조성 역할을 맡긴 VIP들은 어떤 자격 검증도 받지 않은 채 단순히 '거래량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선정된 일반 투자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수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시장 참여자이지, 시장 전체의 건전성을 책임질 중립적 주체가 아니다. 특히 빗썸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이해관계자인 이들이 과연 공정한 시장조성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방식의 '시장조성'은 필연적으로 시세조종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다.
자격도 감독도 없는 상태에서 거래소가 필요에 따라 특정 VIP에게 특정 코인의 거래를 유도하고 보상을 지급하는 구조는, 시장의 자율적 가격 발견 기능을 훼손하고 인위적 거래량 조작을 유발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특히 거래량은 투자자들이 특정 코인의 인기도와 유동성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 중 하나인데, 이것이 인위적으로 조작된다면 일반 투자자들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매수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결국 보상을 받고 거래에 참여한 VIP들이 물량을 정리할 때 일반 투자자들만 손실을 떠안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법제도화를 외치면서 뒤로는 아무런 자격 요건 없이 돈 많은 고객들에게 시장조성자 역할을 맡기는 것은 제도권 금융의 기본 정신을 조롱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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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썸라운지 강남본점 전광판 비트코인 시세가 띄워져 있다. (사진=연합뉴스) |
◇ 가상자산법 시행에도 여전한 감독 공백
가장 큰 문제는 감독 당국의 구조적 한계가 이런 불공정 관행을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면서도 "현재 법규상 거래소의 영업행위 자체를 직접 규제할 수단이 제한적"이라며 "해당 행위가 이상거래나 불공정거래에 해당한다면 분명히 살펴볼 것"이라는 원론적 답변에 그치고 있다.
특히 시장조성과 관련해서는 "아직 법제화가 안 되어서 현재 시점에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이는 가상자산법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감독 체계에 공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법제도화를 외치며 제도권 편입을 추진하는 가상자산 업계에서 이런 불공정거래 의혹이 지속되는 것은 시장 신뢰도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감독 당국이 명확한 기준이나 대응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업계의 자율적 정화 노력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시장조성과 시세조종의 명확한 경계선 설정, 거래소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에 대한 투명성 의무화,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 당국의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알파경제 이준현 기자(wtcloud83@alpha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