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② 빨리빨리 문화의 어두운 이면(裏面), 사회 계급화 가속화도

박남숙 기자 / 기사승인 : 2024-06-24 07: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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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은 대한민국 기자 출신 정치인으로 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 정치부장 등을 거쳤다. 이후 제17·19·20대 국회의원으로 정무위원장, 민주당 대통령후보 총괄특보단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민병두 원장의 ‘K-Sapience’는 전세계인이 열광하는 우리 문화(Korea Culture)에 대해 본인의 경험이나 통찰, 지식 등을 녹여 재해석해 바라본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알파경제=박남숙 기자] 어떤 신질서를 수립할 것인가, 어떻게 공평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가 과제였다. 조선시대의 인재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의 현대판인 고등고시가 여전히 출세를 보장했다.


1951년부터 1959년까지 3급(현 5급) 고등고시 합격자수는 239명에 불과했는데 같은 직급의 고등전형 합격자는 3,080명이나 되었다. 정실임용제도로 대부분을 선발했다(한국역사연구회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누군가 뒤를 봐주는 ’빽‘이 있어야 출세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물자부족은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게 했다. 원조물자를 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치기 문화는 일반화됐다.

서울 가면 눈뜨고 코 베인다, 즉 사기를 당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생활은 각박했고 민심은 흉흉했다. 이런 가운데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문자 해독률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초등학교 교육이 의무화됐으며, 대학진학률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농지개혁으로 소작제가 폐지되고 자작농이 늘어나면서 희망을 가진 것도 한 원인이고 6.25전쟁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로 대학생들의 징집을 연기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높은 교육열이라는 인프라가 만들어졌는데, 일자리는 부족하여 경쟁이 극심한 사회가 만들어 졌다. 피난부터 배급까지, 살아남는 것부터 일자리를 얻고 출세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도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가 되었다.

게다가 해방으로 귀국한 해외동포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그리고 이농으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경쟁은 가중됐다.

좁은 땅덩어리에 내가 살 수 있는 산동네 판잣집의 공간이든, 인력거에 사람을 싣고 나르기 위한 자리 싸움이든 결국 시간 싸움으로 귀결됐다.

공간은 클수록 좋고 시간은 빠를수록 경쟁력이 있다. 대한민국의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 좁은 나라에서 한정된 공간에 자신의 기회의 땅을 갖는다는 것은 힘들다. 청계천이나 삼양동 산동네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도, 광주대단지에서 철거민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무한경쟁이다.

이규태는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들어서서 사는 바람에 공간적 여유가 없고 그 좁은 공간에 비집고 끼어드는 것이 생존 조건이 됐다. 공간의 선점을 위해서는 시간의 선행이 필연“이라고 지적했다. 해방 후 90만 명이 살던 서울에서 1965년에는 인구가 350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사회상을 담은 소설가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1966)는 산업화 과정에서 뿌리 뽑힌 이들의 방황과 자기 상실을 그렸다.

면서기도 권력이던 시대에 부정부패와 갑질이 만연했다. 여기에 줄을 타면 속도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고, 올라타지 못하면 패자가 된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유행가에 담았다.

1965년에 나온 ‘회전의자’라는 노래는 갑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민초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신봉승 작사, 하기송 작가, 김용만 노래). 이 노래는 1969년, 당대에 가장 인기 있었던 구봉서, 남진, 김희갑, 서영춘, 남정임 등 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들이 출연하여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사람 없어 비워 둔 의자는 없더라/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돌아가는 의자에 회전의자에/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올 때마다 앉을 자린 비어 있더라/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아아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빨리빨리에 불을 붙인 것이 산업화와 남북 경쟁이다. '한국에 산다는 것은 경쟁한다는 말과 똑 같아졌다. 대학 직장 결혼 모두가 경쟁이다. 일상이 Fighting이다'(다니엘 튜더). 산업화와 함께 ‘고도경쟁과 상승욕구는 한국인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됐다(홍대선 《한국인의 탄생》).

남북간의 체제 경쟁도 전 사회가 속도전에 돌입하게 했다. 쿠데타로 집권하고 3선 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한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성과가 중요했다. 박정희는 엘리트 관료들을 통해서 경제 계획을 수립했고, 수치 등을 통해서 전국민을 산업역군화하는 동원 체제로 만들었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는데 수출1위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박정희가 4년 안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는데 정주영은 그것을 더 앞당겨서 2년 5개월만에 길을 만들었다. 박정희가 “그래, 임자 할 수 있겠어?”하고 물으면 정주영은 안된다고 말하는 직원들에게 “이봐, 해보긴 해봤어?”라고 추궁했다.

박정희는 주어진 시간과 예산 안에서 그가 말한 도로 병원 교량 등을 제대로 지어낸 기업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정경유착의 시대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았다.

럭키금성그룹의 1970년대 사가에서도 속도주의를 읽을 수 있다.

“우리들은 이 나라의 젊은 일꾼들 / 속력을 경쟁하는 보람찬 대열 / 사랑으로 한데 뭉친 동지들이다 / 무궁화의 강토 건설 우리 손으로 / 나라의 자랑이다 럭키금성 / 세계로 뻗어가는 럭키금성”(송영학 《한국기업에서 경영 가치와 믿음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에서 인용)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이나,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하던 이건희의 일등주의 속도전은 모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던 박정희 시대 국가 총동원 체제의 산물이다.

북한은 속도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천리마 운동(김정은은 이를 계승하여 만리마 정신을 말한다), 새벽별 보기 운동을 했다. 1945년부터 40년간 북한은 한국보다 앞섰다. 2차 대전 후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앞섰던 국가다.

미 중앙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후 복구와 중공업의 발전 속도에서 경제적 기반 확립을 하지 못했던 한국보다 10여 년 앞섰다(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때까지 우세가 계속되었다). 1963년에는 북한의 71%에 이르는 지역이, 1970년에는 모든 마을과 가정에 전기가 보급되었다(그런데 지금의 위성 사진을 보면 평양을 제외한 북한의 밤은 암흑이다).

1972년 북한을 방문한 퓰리처상 수상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lisbury)는 북한을 방문한 후 “엄청난 기술과 산업의 성과를 이룩한 국가”라고 했다. 1972년 박정희 밀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큰 충격을 받았다(빅터 차 《불가사의한 국가》).


(사진=연합뉴스)


잘 닦여진 포장도로와 높은 건물, 웅장한 기념비를 보면서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면 안된다는 우려를 박정희와 나누었다고 한다. 북한에 뒤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속도전에 불을 당겼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됐다. 오죽하면 외국인이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인삿말인 줄 알 정도였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의 고도성장에 기여를 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많이 남겼다.

1970년의 와우아파트, 1994년의 성수대교,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그리고 세월호 침몰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도전과 대충주의가 낳은 결과였다. 작은 전쟁에서 발생하는 전사자 수보다도 더 많은 연간 8000명 가까이가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1등 기업이 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백혈병을 앓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산업화, 정보화, 민주화에 이어서 인간안보(Human Security)가 중시되는 인간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자성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기억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빨리빨리 문화는 이웃 국가에도 전염됐다. 만만디 문화를 갖고 있던 중국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콰이콰이문화로 대체됐고 우리가 고속 성장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경험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중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박현숙은 ‘자리 차지하기’(새치기)라는 말이 중국 사회를 설명하는 사회학 용어로 등장했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주택정책이나 교육정책이 바뀌어 있고, 또 자고 일어나면 홍위병들이 날뛰며 계급 투쟁 만세를 외치다가, 어느 날은 시장 사회라며 돈 돈을 외치는 세상이 됐던게 중국인들이 겪어 온 현실이라고, 때문에 자기 자리를 지키거나 먼저 차지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자리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걸 중국인들은 뼈저리게 경험해 왔다는 것이다”(박현숙 '산부인과에서 새치기를 당하다' 한겨레21. 2005년 8월 16일/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에서 재인용).

다만 속도전의 원조인 북한에서 날래날래가 일반 인민들의 입에 붙어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은 속도를 원하지만 인민의 입장에서는 보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는 달라 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 상공회의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는 ”한국인처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에서 5, 10년 쓸 것이 한국에서는 1, 2년이 되면 골동품이 된다.

변화에 익숙하며 변화를 좋아하고 또 즐기기까지 한다‘(《우리도 몰랐던 한국의 힘》)고 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성, 분명 그것은 우리의 장점으로 작동했다.

중국 런민대학교 마샹우 교수는 “한국인들이 부끄러워했고 한때 세계적 웃음거리였던 빨리빨리 문화도 한류문화의 기세에 한 몫 했다”고 할 정도로 한국의 산업에 미친 영향은 방대하다.

경제 대국이 되는데, IT 강국이 되는데, 코비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데, 한류가 세계 문화가 되는데 어느 정도는 빨리빨리가 작용했다. 이제 한국인은 빨리빨리 없으면 일상에 차질이 생긴다.

“맛없는 음식은 참을 수 있더도 늦게 배달되는 음식은 참을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빨리빨리는 우리 생활 전반에까지 침투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 있다는 배달 문화, 오죽하면 브랜드를 ‘배달의 민족’이라고 했을까. 실로 빨리빨리의 영향은 전방위적이다.

1960~1990년대에 부모 세대의 희생과 헌신으로 빨리빨리문화의 혜택을 본 집단이 있다. 평평하게 잘 다져진 경기장,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 가난에서 탈출하고픈 개인들의 욕망이 서로 어우러져졌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였다. 누구가 공부만 잘하고 시험만 합격하면 됐다. 평평한 경기장에서 성공을 향한 입장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다리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떨어뜨리면서 맨 위에 올라가기 위한 무한 경쟁을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여러 가지 문제점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미덕이 있었다면 그 계층 사다리가 있어서 대한민국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고위공무원, 법조인, 의료인, 대기업 직원, 신흥 엘리트 1세대가 자신들이 힘겹게 얻은 우월한 위치를 자식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고 그 결과 계층 이동이 닫혔다. 계층 사다리가 걷어차였다.


(사진=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에서처럼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로 계급화됐다. 그들이 빨리빨리 올라선 만큼 빨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서민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가는 것보다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사회가 되었다. 조선시대 말(영정조까지 역대 왕조가 세계 13위권의 선진 국가였다는 분석이 있다. 사실 유럽의 몇나라와 아시아 3국 정도가 가장 선진적인 국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위도식하던 양반들이 만든 계급사회가 나라를 망쳤다. 평등한 출발점에서 빨리빨리 일어선 계층이 신양반 계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알파경제 박남숙 기자(parkns@alpha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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