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돈으로 승계 자금 마련?
옥상옥 구조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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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화) |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보유한 한화 지분 11.32%를 세 아들에게 증여함으로써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마무리됐다는 평가다.
한화그룹은 표면적으로는 "경영권 승계 관련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신속히 해소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승계 과정에는 주가 하락 시점을 활용한 증여세 절감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통한 자금 마련 등 복잡한 전략이 숨어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 주가 하락 타이밍 노린 지분 증여
김승연 회장은 지난달 31일 보유 지분의 절반인 11.32%(844만 8970주)를 장남 김동관 부회장(4.86%), 차남 김동원 사장(3.23%), 삼남 김동선 부사장(3.23%)에게 각각 증여했다. 증여세는 약 2218억 원으로 추산된다.
주목할 점은 이 증여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3조6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발표 이후 급격한 주가 하락이 일어난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 발표 직후 회사 주가는 13% 하락했고, 같은 날 한화의 주가도 12% 넘게 하락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주가는 증여세에 영향을 미치니 낮아진 주가로 증여세를 절감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만약 주가가 더 높았다면 세 아들이 부담해야 할 증여세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이에 대해 한화는 "과세 기준 가격은 한 달 후인 4월 30일 기준 전후 각각 2개월 주가 평균 가격으로 결정된다"며 "이에 따라 주가가 낮은 시점에 증여를 결정했다거나 주식 가격을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주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번 증여로 세 아들은 한화의 직접 지분율을 합쳐 20.51%를 확보하게 됐다.
여기에 세 아들이 100% 지분을 보유한 한화에너지의 한화 지분 22.16%까지 고려하면 총 42.67%의 지배력을 갖게 됐다. 김승연 회장의 잔여 지분 11.33%를 크게 웃도는 수치로, 실질적인 3세 경영 체제가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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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한화) |
◇ 금감원 제동에 '정면돌파' 선택
한화그룹이 승계 마무리를 전격 발표한 배경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를 둘러싼 논란이 자리 잡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 2월 세 아들이 100% 지분을 보유한 한화에너지 등이 소유한 한화오션 지분 7.3%를 1조3000억 원에 인수한 직후 역대 최대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시장에서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오너 일가에게 현금을 넘기고, 그 공백을 일반 주주들에게 메우라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7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에 정정을 요구하며 제동을 걸었다.
유상증자 당위성, 주주소통 절차, 자금사용 목적 등에서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정보가 미흡하다는 이유에서다.
함용일 금감원 자본시장·회계 담당 부원장은 1일 서울 여의도 금감원에서 자본시장 현안 설명회를 열고 "증자를 전후한 자금의 이동, 사업 승계에 관련된 사안이 증자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이사회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정당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는지를 투자자에게 세세하게 설명하라는 것이 정정 요구의 취지"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에도 혹시 기재가 불충분하거나 불성실하다면 당연히 재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정해진 방향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한화그룹은 정면돌파 전략을 선택했다.
금감원의 정정 요구 4일 만에 지분 증여를 결정함으로써 "승계가 완료됐으니 유상증자와 승계를 연결시키는 오해를 불식시키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한화 측은 "이번 지분 증여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상증자를 승계와 연결시키는 시각은 불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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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화솔루션) |
◇ 주주 돈으로 승계 자금 마련?
비판의 핵심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오너 일가 회사에 거액을 제공한 후 자금 부족을 이유로 주주들에게 손을 벌렸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가족회사인 한화에너지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부터 받은 현금을 향후 한화에너지의 상장이나 배당 등을 통해 세 아들의 증여세 납부에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결국 큰 틀에서 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일반 주주들이 오너 일가의 승계 비용을 간접적으로 부담하는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한화에너지는 IPO를 추진 중이며, 상장 과정에서 구주매출을 통해 현금을 확보할 경우 증여세 납부에 활용할 수 있다.
이는 한화그룹이 주주의 자금을 활용해 승계 비용을 충당하는 동시에 경영권 이전도 완료하는 다목적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이재명 대표는 "우리 자본시장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면서 "자본시장을 현금 인출기로 여긴다'는 주주들의 비판에도 할 말이 없다"고 비판했다.
기업들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일반 주주들의 이익이 희생되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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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화) |
◇ 옥상옥 구조 그대로
한화그룹은 "한화에너지와 ㈜한화의 합병 계획은 없다"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지배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화그룹의 지배 구조는 오너 일가가 비상장 회사인 한화에너지를 통해 지주 회사 격인 ㈜한화를 지배하는 '옥상옥' 형태다.
장남 김동관 부회장은 한화에너지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으며, 차남 김동원 사장과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각각 25%씩 보유하고 있다.
이번 승계를 통해 세 아들은 이미 명실상부한 그룹 지배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당장 합병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세 아들은 각자 다른 사업 영역을 맡고 있다. 김동관 부회장은 우주·방산·태양광 등 그룹의 핵심 제조업 분야를, 김동원 사장은 금융 부문을, 김동선 부사장은 유통·호텔·로봇 등 서비스 및 신사업 분야를 중점적으로 이끌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업무 분담에 따라 향후 계열 분리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화에너지가 한화와 합병해 지주사 전환 조건에 맞춰 지배구조를 개편하고, 삼형제가 각자 기업을 인적분할하는 시나리오다.
인적분할 이후 형제 간 보유 지분을 교환하면 각자 맡은 계열사의 지분율을 높일 수 있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지분 증여 발표 다음 날인 1일, 한화 주가는 장중 8%에서 11% 이상 급등했다. 이는 시장에서 경영권 승계 관련 불확실성이 해소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러나 금속노조는 지난 3월 국회 토론회를 통해 한화그룹의 사업 재편 과정과 노동 관계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노조 측은 한화그룹이 경영권 승계를 진행하면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잦은 계열사 분할 및 합병이 노동조합 탄압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알파경제 이준현 기자(wtcloud83@alpha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