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우려 털어냈지만…'볼파라 시너지' 증명이 진짜 과제
![]() |
루닛 창업자인 백승욱 이사회 의장(왼쪽)과 서범석 대표이사. (사진=루닛) |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의료 인공지능(AI) 선도기업 루닛의 창업자들이 오는 21일 대규모 보호예수 해제를 앞두고 선제적으로 "올해 매각 계획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백승욱 이사회 의장과 서범석 대표이사가 보유한 총 230만7053주(지분율 7.96%)의 보호예수가 해제되는 상황에서, 시장의 오버행(잠재적 매물 출회) 우려를 정면으로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주가 방어 차원을 넘어, 지난해 12월 일부 임원들의 교묘한 블록딜 매각으로 훼손된 투자자 신뢰를 회복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된다.
특히 폭발적인 매출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적자와 2027년으로 연기된 흑자전환 목표 속에서, 창업자들이 장기적 성장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려는 의지로 풀이된다.
◇ 주가 급락 불렀던 '경계선' 블록딜
루닛 창업자들의 이번 '매각 부재' 선언을 이해하려면, 지난해 12월 18일 발생한 블록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루닛 임원 6명과 주요주주 1명은 총 38만334주를 시간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매각했다. 문제는 매각 방식이었다.
특히 5명의 임원은 각각 정확히 6만4156주를 주당 7만7934원에 매도했다.
매도 금액은 49억9993만3704원으로, 50억원 이상 매도 시 의무화되는 사전공시 규정을 단 1주 차이로 피해갔다.
1주만 더 팔았다면 매각금액은 50억1만1638원이 되어 30일 전 사전공시가 필요했던 상황이다.
시장은 이를 투자자 보호 규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꼼수 매각'으로 받아들였다.
블록딜 소식이 알려지자 루닛 주가는 하루 만에 10.26% 급락했다. 연중 최고가를 기록하던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내부자의 고점 매도' 우려가 확산됐다.
창업자들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백승욱 의장과 서범석 대표는 같은 날 총 6억원 규모의 자사주 7747주를 장내 매수하며 주가 방어에 나섰다.
하지만 시장의 불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루닛 주가는 블록딜 이후 5일간 25.17% 급락하는 충격을 겪었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보호예수 해제를 앞둔 창업자들의 선제적 소통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으로 해석된다.
![]() |
(사진=루닛) |
◇ 매출 273% 폭증 했지만…영업 손실은 확대
루닛 창업자들의 이 같은 결정 배경에는 회사의 견고한 성장세가 있다.
올해 1분기 루닛의 연결 매출액은 192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273.6% 급증했다. 이는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이다.
특히 해외 매출이 179억원으로 전체의 93%를 차지하며,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력 제품인 AI 암 진단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는 전년 대비 39% 성장했고, 암 치료용 AI 바이오마커 플랫폼 '루닛 스코프'는 135% 급증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여전한 수익성 과제가 도사리고 있다.
1분기 영업손실은 20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1.4% 확대됐다. 글로벌 시장 확장을 위한 마케팅 비용과 연구개발 투자가 급증한 결과다.
더 큰 부담은 볼파라 인수에 따른 재무적 압박이다. 루닛은 지난해 뉴질랜드 유방암 검진 AI 기업 볼파라를 약 2600억원에 인수했다. 이 중 1715억원을 전환사채로 조달했는데, 이는 제약·바이오 업계 평균(172억원)의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서범석 대표는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흑자전환 목표를 2027년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2024년 또는 2025년을 목표로 했던 것에서 2년 늦춰진 것이다.
서 대표는 "현재 글로벌 의료AI 시장 개화 초기 단계에서 단기 수익성보다 시장 지배권 확보가 중요하다"며 '성장 우선' 전략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 |
(사진=루닛) |
◇ 미국 진출 교두보 vs 단기 수익성
루닛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볼파라를 인수한 이유는 명확하다. 미국 시장 진출이다.
볼파라는 미국 내 2000개 이상 의료기관에 유방암 검진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으며, 미국 유방촬영술 시장 점유율의 약 42%를 차지한다.
루닛에게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제공한다. 즉시 활용 가능한 판매 네트워크와 1억장 이상의 유방촬영 데이터다.
AI 개발의 핵심인 고품질 의료 데이터 대량 확보 및 루닛이 자체적으로 미국 내 2000개 의료기관과 관계를 구축하려면 수년이 걸릴 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올해 1분기부터 볼파라의 판매 네트워크를 통해 루닛의 3차원 유방단층촬영술 AI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 DBT'의 미국 판매가 시작됐다. 이는 볼파라 유통 채널을 통한 루닛 제품의 첫 북미 진출 사례로, 향후 시너지 창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부담이 크다. 볼파라 인수로 매출은 늘었지만 동시에 영업손실도 확대됐다. 볼파라의 구독형 소프트웨어(SaaS) 매출 구조는 안정적이지만, 통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미국 현지 마케팅 투자가 수익성을 압박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루닛의 선택을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해석한다.
글로벌 의료AI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점에서 미국 시장 진출을 놓치면 향후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의료AI 시장에 본격 진출하고 있어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 |
서범석 루닛 대표. (사진=루닛) |
◇ 단기 우려 털어냈지만…'볼파라 시너지' 증명이 진짜 과제
루닛 창업자들의 '매각 부재' 선언으로 단기적인 오버행 우려는 해소됐지만, 이제는 기업의 본질적인 성장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볼파라와의 시너지 창출 속도다. 올해 하반기부터 볼파라의 미국 네트워크를 통한 루닛 제품 판매가 본격화될 예정인데, 이것이 기대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루닛은 2025년 볼파라 시너지 포함 매출을 750억원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전환사채 부담 관리도 중요한 과제다. 지난해 발행한 1715억원 규모 전환사채는 1년 후부터 주식 전환이 가능하다.
전환가액은 주당 5만4872원으로, 현재 주가(약 5만7600원) 수준에서는 전환 압력이 높지 않다. 하지만 주가가 더 오르면 전환으로 인한 지분 희석 우려가 커질 수 있다.
무엇보다 2027년 흑자전환 목표 달성 가능성이 관건이다. 루닛은 현재 비용의 40%가 미래 투자라며 적극적인 성장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흑자전환 목표가 연기될 경우 시장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루닛의 장기 성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단기적 변동성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알파경제 이준현 기자(wtcloud83@alpha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