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대선일도 쉴 수 없다"…CJ·한진·롯데, 배송 강행에 노동자 투표권 박탈

이준현 기자 / 기사승인 : 2025-05-22 08: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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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편의 뒤에 숨은 헌법적 가치 퇴색
'특수고용직'이라는 허울, 권리 사각지대
정치권도 강력한 경고
전국택배노조와 시민사회단체들이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통령 선거일인 6월 3일 택배없는 날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알파경제=이준현 기자]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2주 앞둔 현시점, 민간 택배업계 대부분이 대선일 정상 운영을 검토하면서 택배노동자 참정권 침해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대선 당일에도 '허리 펼 틈 없이' 일해야 하는 택배노동자들의 기본권이 '소비자 편의'와 '배송 경쟁'이라는 논리에 밀려 희생되는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택배 현장에서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조차 침해당하는 퇴행적 상황"이라는 분통이 터져 나오고 있다.

◇ 소비자 편의 뒤에 숨은 헌법적 가치 퇴색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대선일, 택배 노동자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배송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22일 택배노조에 따르면 우체국택배를 제외한 민간택배사의 택배노동자들은 투표일에도 배달을 진행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투표권 행사가 어려운 여건에 놓여있다.

특히 우려되는 점은 사전투표일마저 평일이어서 택배노동자들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사실상 봉쇄된다는 점이다. 업무가 빡빡해져 사전투표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선일마저 근무하게 되면 이들의 헌법상 권리는 완전히 무력화된다.

택배업계는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 당시만 해도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자 대부분 휴무를 결정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상황은 역주행하고 있다.

롯데글로벌로지스가 6월 3일 정상 운영을 결정한 데 이어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등 경쟁업체들도 휴무 지정을 재고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에는 쿠팡의 공격적 배송 전략이 자리한다.

쿠팡이 '로켓배송', '새벽배송'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자 기존 택배업계는 주7일 배송으로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한진택배는 최근 주7일 배송 시스템을 도입했고, CJ대한통운도 '매일 오네(O-NE)' 서비스를 앞세워 휴일에도 쉬지 않는 배송체제로 전환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쟁이 단순한 서비스 확장을 넘어 헌법적 가치의 퇴색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은 근로시간 중 선거에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택배노동자 대다수는 아침부터 밤까지 문전배송을 수행해야 해 사실상 투표권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서울 강서구 CJ대한통운 터미널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 '특수고용직'이라는 허울, 권리 사각지대

택배노동자의 참정권 침해가 더욱 심각한 이유는 이들이 법적으로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돼 근로기준법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 점이다.

대부분의 택배기사는 택배회사와 직접 고용관계가 아닌 대리점과 위수탁 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 신분이다. 이로 인해 근로기준법상 공휴일 휴무 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2022년 1월부터 5인 이상 사업장은 관공서 공휴일과 대체공휴일을 유급휴일로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특수고용직 신분인 택배기사들에게는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결과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마저 온전히 누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택배노동자들은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휴일근무수당, 연차휴가와 같은 기본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데, 이제는 선거권마저 침해받고 있다"며 "노동 형태가 변화하는 현실에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해 비임금 노동자 860만 명이 권리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택배 노동자뿐 아니라 배달 라이더, 플랫폼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등 다양한 특수고용 형태의 노동자들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공동대표는 "경쟁 심화로 노동 여건은 오히려 악화하는 등 쉬어야 하는 날조차 쉬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권리 보장을 위해 사업장 시스템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박찬대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 (사진=연합뉴스)


◇ 정치권도 강력한 경고

대선을 2주 앞둔 시점에서 정치권은 택배노동자의 참정권 침해를 심각한 민주주의 훼손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특히 택배회사들을 직접 지목하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상임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롯데택배가 6월 3일을 휴무일로 지정하지 않았다"며 "특수고용직인 배달 라이더, 플랫폼 노동자의 처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노동자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즉시 마련해야 한다"고 해당 기업들을 직접 겨냥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은 더 나아가 "현재 우체국택배를 제외한 대부분의 택배회사가 대통령 선거일에도 배송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6월 3일을 '택배 없는 날'로 정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에서는 쿠팡을 제외한 대부분 택배업체가 선거 당일 배송을 멈췄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특히 차 의원은 "택배노동자뿐 아니라 소위 '3.3% 노동자'라 불리는 비임금 노동자수는 860만 명에 달한다"며 "노동 형태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참정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순히 선거일 휴무를 넘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모든 노동자도 선거일에 마음 편히 투표할 수 있도록 '일하는 모든 시민을 위한 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도 이날 성명을 내고 "택배 업체가 대선일을 휴무일로 지정하지 않아 택배 노동자들이 참정권 피해를 보고 있다"며 "국토교통부가 택배 없는 날 지정을 권고하고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민생경제연구소, 한국진보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쿠팡이 주7일 배송, 새벽배송 등으로 택배물량을 독식하면서 다른 택배사들까지 경쟁적으로 휴일배송에 나서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며 국토교통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는 단지 한 직종의 문제가 아니라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확산되면서 수많은 노동자가 제도 밖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반면 택배사들은 선거일 운영에 대해 "협의 중인 사안"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측은 "아직 휴무가 결정된 게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쿠팡은 2023년에도 "쿠팡친구의 경우 주5일 근무는 물론 연중 130일 쉬고 싶을 때 언제든 쉴 수 있다"며 '택배 없는 날' 동참 요구를 거부한 바 있다.

대선을 앞두고 택배노동자의 참정권과 관련한 갈등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알파경제 이준현 기자(wtcloud83@alpha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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